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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기도 스타를 꿈꿨던 한 소년의 작지만 큰 소원

작성일 : 2021-02-10 18:09 작성자 : 김인환 기자

[열린사람들=김인환 기자] 도봉구. 응답하라1988로 유명세를 타게 된 서울특별시 최북단에 위치한 지역구이다. 과거에는 서울이 아니기도 했던 이 동네는 노원구와 더불어 아직도 서울 내에서 재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역이다.

 

오늘 소개할 인물은 서울의 작은 지역구 도봉구에서 합기도 스타를 꿈꿨던 한 소년의 사회공헌 이야기이다.

1998년 도봉구 창동은 태권도, 검도, 합기도 등의 도장은 초등생 사이에서 서로 간의 우정을 쌓는 필수 코스였다. 그 중 합기도는 단연 으뜸이었다.

 

합기도장에는 우렁찬 기합 속에서 항상 또래 친구들의 리더 역할을 하는 소년이 있었다. 그의 이름이 오늘의 주인공 이동규 씨이다.

나는 커서 합기도로 사회에 꼭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거야

소년의 작은 소망이었다.

 

소년은 어렸을 때부터 다투는 것을 싫어했다. 특유의 리더십으로 분쟁이 일어나면 먼저 나서 화해를 시키는 역할을 줄 곧 맡았다.

 

소년의 이런 리더십은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 전교부회장 이라는 직책을 수행하며 더욱 빛을 발휘했다. 소외된 친구들을 찾아가 고민을 들어줬고 싸움을 못하는 친구들에게는 간단한 호신술을 가르쳐줬다. 전교부회장 이동규의 작은 소망은 왕따 없는 학교였기 때문이다.

어느덧 중학교에 진학한 소년은 의젓한 청소년이 됐다. 몸도 성장하고 정신도 성장했다. 중학교는 초등학교와 상황이 달랐다. 주변 동네의 다양한 초등학교 출신 또래들이 모였고 사춘기가 접어들 무렵이었기에 개개인만의 개성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당시 유행했던 문화에는 스파링이라는 결투가 유행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는 변질되어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문화가 됐다. 이를 본 그는 소위 말하는 일진들과 일부러 친해졌다. 매일 이벤트처럼 열렸던 스파링을 적어도 약자를 괴롭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질풍노드의 일진들을 막기에 혼자 힘으로는 부족했다. 여기서 큰 좌절을 느낀 그는 방향을 틀어 소외된 약자들과 친해지려 노력한다. 적어도 자신과 있을 때는 스파링 상대로 뽑지 못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왕따를 당했던 A씨에 따르면 그래도 동규 옆에 있으면 스파링 당할 걱정은 없어서 좋았아요” 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에게 큰 악재가 발생한다. 그가 다니던 합기도장은 연내 행사로 시범단의 화려한 기술을 선보이는 대회가 개최됐다. 아무래도 퍼포먼스가 중요했기에 화려한 기술들을 자주 연습했다. 백덤블링이 대표적이 예로 볼 수가 있는데, 이러한 연습을 하다가 발을 헛 딛으며 무릎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걸어다니기도 힘들 정도로 고통이 지속됐고, 병원에서는 그에게 지금 한참 성장기이기 때문에 더 이상 무릎에 무게가 심하게 실리는 행동을 하면 평생 합기도를 못 할 수도 있어요” 라고 경고했다.

 

의사 소견에 그의 부모님은 강제로 그에게 합기도를 못하게 막았다. 처음에는 고집도 부렸다. 하지만 부모님의 생각은 완강했다. 그렇게 합기도를 그만두게 된 그는 늦은 사춘기가 찾아온다. 당시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당연히 공부는 뒷전으로 밀려났고, 중상위권의 성적을 냈던 그의 성적도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방황을 하다 보니 그 앞에 놓여진 것은 고교진학이었다. 어차피 합기도도 못하게 된 거 공부해서 뭐하나 기술이나 배워서 돈이나 벌어야겠다” 그는 공고에 진학하게 된다. 취업을 위해 진학한 학교였지만 공부는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합기도의 대한 열망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합기도로 진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난 지금 뭐하는 거지?” 계속 합기도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러던 고3 겨울 어느날. 학교가 끝나고 집을 가고 있었다. 그는 학교에서 집까지 지하철 4정거장 정도의 거리였기에 항상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 한동안 생각 없이 창문만 바라보고 있다 잠들었다. 어이 학생 일어나”  버스 기사님이 그를 깨운 것이었다.

 

졸린 눈을 비비고 부랴부랴 버스에서 내렸다잠을 깨기 위해서 일단 걸어야겠다는 생각에 아무 생각 없이 정처 없이 걷기만 했다. 지금 걷는 방향이 집으로 가는 방향인지도 알지 못한 채겨울바람이 매서웠다. 추위에 정신을 차리게 된 것 이었다. 그런데 그의 발걸음은 합기도장 앞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찾아온 것이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가 어리석었구나. 내가 더 수련을 해서 소외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이 될 수 있는데” 4년간 방황했던 그의 생각이 한꺼번에 정리가 됐다. 그리고 돌아보니 현재 자신의 눈앞에는 수능이라는 큰 산이 남아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일단 수능부터 끝내고 처음부터 다시 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하자. 그리고 꼭 합기도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수능이 끝나고 대학도 붙었다. 하지만 부모님께 진지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씀드리고 대학을 포기하고 합기도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하는 운동이었기에 쉽지 않았다. 그러나 남들보다 1시간 일찍 나오고 1시간 늦게 들어가며 체력과 기술을 끌어올렸다.

 

1년 후 자신의 스승이었던 합기도장의 관장에게 인정받아 가르칠 수 있는 실력까지 도달하게 됐다. 본격적으로 도장에서 아이들에게 합기도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6개월 정도 흘렀을 즈음에 갑자기 도장 학부모들이 단체로 그를 찾아왔다. 도장 특성상 학부모들과 자주 연락을 하며 지냈던 그였기에 이러한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괜히 자신을 되돌아보며 잘못한 것이 있나 싶었다.

사범님 덕분에 우리아이가 이제는 학교를 가고 싶어해요

관원비입니다. 말씀을 하시지 그랬어요

우리아이가 예전과 다르게 자기 주장도 얘기하고 그래요

 

다시 합기도장에 돌아왔을 때 그의 철학이 하나있었다.“소외된 아이들이 없는 도장과 이를 만드는 선생님이 되겠다

 

외소한 체격으로 학교에서 맞고 다니는 아이, 도장은 다니고 싶은데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아 어려운 아이, 자신감이 부족하여 혼자 울고 있는 아이. 이런 아이들을 몰래 돕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에게 감사함을 전달하기 위해 찾아온 학부모들이었다.

이러한 그의 선행은 동네에 퍼지게 됐다. 당연히 관원은 늘어났다. 하지만 항상 인생은 롤러코스터라고 했던가. 그의 무릎이 또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걷기가 힘들 정도로 고통이 찾아오는 날이 빈번해졌다. 이를 지켜본 그의 어머니는

동규야 그러다 정말 큰일난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할 만큼 했다고 엄마는 생각한다.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라고 그를 걱정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스승인 관장님까지도 그의 은퇴를 설득했다.“너의 노력과 피와 땀 다 안다. 그만했으면 충분히 할 만큼 했다 동규야” 너무 억울했다. 이제 조금씩 해보려고 하는데 몸이 안 따라주니 미칠 것 같았다. 고통은 더욱 심해졌고 당장 치료가 필요했다. 그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렇게 합기도장과 이별을 하게 됐다.

 

이후 그는 치료에만 매진했다. 꾸준히 치료를 이어가자 몸은 조금씩 호전되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우편함에는 입영통지서가 꽂혀있었다. 4주 뒤에 논산으로 오라는 통지서였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만약 합기도를 계속 했다면 군대가 미뤄졌겠지? 그렇다면 차라리 이 상황이 나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합기도를 더 오래했으면 군대가 더 늦어져 심각한 경력 단절이 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생활 2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 안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린 것은 그동안 갇혀 지내왔던 자신에게 더 큰 세상을 보고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 전역 후 그는 바로 워킹홀리데이를 신청했다. 운이 좋게 바로 승인이 나서 바로 호주에 몸을 실었다.

경험이 목적이었던 호주행 워킹홀리데이는 그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다.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돌을 맞았고, 조금이라도 약해보이면 길거리에서 집단린치는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다행히 그가 당한 것은 돌팔매 정도였다. “다르다는 이유로, 약자라는 이유로 피해자가 되는 것은 정말 불합리하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만들어야겠다.”이런 다짐이 들자 그는 더 이상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바로 짐을 싸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6개월 만의 귀국이었다.

 

한국에 오니 당장에 돌아갈 곳이 없었다. 대학교를 갈수도, 합기도장을 갈 수도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에게 남은 선택권은 경제활동이었다. 당시 사업을 하고 있었던 어머님께 부탁을 했다. “어머니, 하시는 일 배우고 제가 직접 사업을 해보고 싶습니다” 다행히 어머니께서는 허락을 해주셨고, 3개월 뒤 남대문에 작은 가게를 차리고 사업을 시작했다. 악세사리를 제작하여 해외에 수출하는 사업이었다.

 

원래 사업 1년차는 돈을 번다고 했던가, 대박이 났다. 평생 한번도 만져보지 못했던 돈을 만져보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뭔가 허전한 느낌이 늘 따라다녔다. 돈은 벌지만 자신의 것이 아닌 느낌 때문이었다.“먹고 자고 할 만큼만 있으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하나당시 그가 든 생각이었다.

무작정 자신이 성장한 합기도장에 전화를 했다. 위에서는 따로 언급을 안했지만 그의 스승인 관장 역시도 몰래 어려운 아이들을 돕고 있었기 때문이다.“관장님, 저도 어려운 친구들을 돕고 싶은데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이에 그의 스승은 오늘 당장 와서 같이 얘기를 해보자고 했다. 그리고 몇몇 친구들의 사정을 애기하며 후원을 부탁했다. 단 조건은 물질적 후원 뿐 만 아니라 직접 찾아가서 후원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흔쾌히 승낙했고 바로 실천에 옮겼다. 드디어 마음 속 깊숙한 곳에 가득 채워진 느낌이 들었다.

 

합기도가 아닌 다른 것으로 처음 후원을 하게 된 그는 깨달았다. “너무 합기도에만 국한되어 있었구나. 직접 발로 뛰어서 어려운 친구들을 도와줘야겠다

 

그날 이후 그는 일부러 대학로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생각한 소외계층은 예능꿈나무였기 때문이다. 그의 진심이 통했던 것일까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게 됐다. 동창은 대학로에서 길거리 공연을 하는 친구였다. 그런데 과거와 다르게 피골이 상접한 모습을 발견하게 됐다. “돈이 없어서 3일 정도 굶었어. 이 바닥이 다 그렇지 뭐” 그는 바로 친구를 데리고 고깃집으로 갔다. 그리고 모든 고기를 종류별로 시켜주며 물어봤다.“밥은 굶고 다니지 말고 나한테 연락해. 너랑 비슷한 친구들도 같이

 

이를 시작으로 그는 정기적으로 친구를 시작으로 예능꿈나무들에게 주말마다 식사를 제공했다. 그리고 이는 자신이 돈을 벌어야 되는 목적이 됐다. “니가 뭘 그리 잘났다고 그렇게까지 하냐?” 손가락질 하는 시선도 있었다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합기도에서 마무리 짓지 못했던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을 할 수 있어서 그저 행복했다.

 

어느덧 사업이 2년차에 들어섰다. 경제 불황이 계속되자 수출하던 업체들이 하나둘씩 계약을 해지하기 이르렀다. 적자의 연속이었다. 당장 그의 수중에는 밥먹을 돈도 없었다. 인건비와 임대료는 나날이 밀려갔다.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는 눈물을 머금고 난생 처음 카드대출을 받아 밀린 금액을 처리했다. 그리고 폐업했다.

 

집에서 부모님께 손 벌리는 것은 죽어도 싫었다. 전문적인 경력과 학력이 부족했던 그는 당장 자신을 써준다는 곳에 무작정 일을 시작하게 됐다. 알바에서부터 영업까지 닥치는 대로 했다.

 

하지만 점점 지쳐갔다. 자신의 어릴적 꿈과 멀어져도 너무 멀어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도움을 주는 사람은커녕 앞가림도 못하는 자신이 너무 싫었다.

 

하루 하루 지쳐가던 어느 날. 오래된 한 친구가 갑자기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다며 횟집으로 오라고 했다. 그 친구는 몇 안되는 자신의 작은 소망을 아는 친구 중 하나였다. 자신감이 바닥을 치고 있을 때였기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거절했지만 계속된 설득 끝에 술이나 얻어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찾아갔다.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한국사회공헌협회 회장이었다. 친구가 그의 생각을 이미 말해 놓은 상태였기에 자연스럽게 대화는 이어졌다. “동규 씨는 왜 누군가를 돕고 싶어해요?” 그는 자신의 가치관과 살아온 날들을 쭉 읊었다. “현재 우리가 채용할 여력은 안 되어서 같이 일하기는 힘들 것 같고, 주말에 있는 사회공헌 활동을 먼저 같이 해보는 건 어때요?”  뭔가 희망을 보는 것 같았다. 바로 하겠다고 의사를 밝혔고 그주 주말 처음으로 함께 사회공헌 활동에 나섰다. 당시 처음 했던 활동이 시니어 세대를 위한 헬스케어 봉사활동이었다.

 

그렇게 2주 정도 흘렀다. 매주 주말이 기다려졌다. “진짜 먹고 살 정도만 있으면 되는데 같이 이일을 본업으로 하고 싶은데 같이 일하면 안될까요?”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뭔가 홀린 듯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그의 진심은 통했고 본격적인 사회공헌 활동에 임하게 됐다. 그의 직책은 대외협력이었다.

 

함께 마음에 맞는 기업들을 만나러 다녔다. 그리고 그 기업들과 사회공헌 캠페인을 만들었다. 대표적인 사회공헌 캠페인이 우리누림이었다. 우리나라 전통음식을 전세계에 알리는 캠페인으로 기업이 후원을 하면 청년들에게 돌아가는 활동이었다. 이외에도 처음 발을 들여놓았던 시니어 헬스케어 봉사활동을 직접 주관해서 진행했다.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합기도 스타를 꿈꿨던 소년의 작은 소원이 생활이 됐기 때문이다. 이후 소년이었던 청년 이동규 씨는 어머님의 사업을 도우면 지속적으로 사회공헌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누군가 행복하기 때문에 제가 행복해요그가 열린사람들에 전한 메시지이다.

 

30세 청년 이동규. 그는 오늘도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어려운 이들을 도우며 자신의 꿈을 더 크게 실천하고 있다. 그의 지속 가능한 사회공헌 활동을 응원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