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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성찰지능 4편]

작성일 : 2017-06-15 18:10 작성자 : 진로전문가 이혜진

자기이해지능 칼럼은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기 위한 나침반으로 활용해도 좋을 것 같다.

오늘도 100만 명의 청춘들이 학교, 회사, 도서관, 각종스터디모임 등 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받지 못하는 현실이 매우 안타깝기만 하다. 

그래도 이 글을 읽는 당신만은 꼭 지금의 이 노력이 결실을 이루기까지

이 글이 결정적인 도움이 되길 기대하며 자이이해지능 얘기해보도록 하겠다.

 

혹시 ‘프랭클’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가?


그는 2차 세계대전당시 아우슈비츠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다.

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마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지내야 했지만

그런 상황을 극복하고 살아남아 “죽음의 수용소에서” 라는 책까지 냈다.

그 책에는 죽음의 공포에 항상 시달릴 수밖에 없는 불안한 환경 속에서

사람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그 모습을 자세히 그려내고 있다. 


그 중에서 꼭 알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있다.
 
그는 그 곳에서 신기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수감자들이 사망하는 시기

급격하게 많아지는 기간이 크리스마스부터 연초까지의 약 일주일 정도라는 것이었다. 


이상하지 않는가? 일반적으로 가장 희망이 가득할 것 같은 그 시기에 왜? 사망자가 급증한 걸까?

이게 아직 나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면 이 생각을 해보길 바란다.

지금 우리도 불확실한 미래때문에 항상 고통스러운 상황이지 않은가?

우리의 현재 모습과 닮아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 프랭클이 어떻게 이 상황을 극복해 나갔는지에 대해서 안다면

우리에게도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실마리정도는 풀릴 거라 확신한다.

 

그럼 다시 왜 유독 그 시기에 과연 어떤 변수가 있었기에 사망자 수가 급증한 것일까?


외부적인 요소에 변화가 있지는 않았을까? 예를 들어 식량배급? 기온의 변화? 노동의 강도?
그러나 그 시기에 눈에 띌만한 외부적인 요소의 변화는 없었다.
그렇다면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난 것일까? 
  
정답은
 ‘긍정희망’이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막연한 긍정희망’이었다.

이들은 
‘내년이 되면 이 생활이 끝나지 않을까?’ 
‘분명 내년에 좋은 일이 일어날 거야.’ 

라는 막연하고 허황된 기대를 했다. 


그러나 한 해가 지나도 아무런 변화없는 냉혹한 현실앞에 그들 스스로 지쳐간 것이었다. 
스스로가 만든 희망이 오히려 더 큰 절망으로 돌아오면서 
불안감과 공포감이 훨씬 더 
급격히 심해졌고 이런 스트레스 때문에 
정신과 육체가 모두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우리도 그냥 친한지 않은 사람에게 뒷통수 맞는 것보다

정말 내가 믿고 모든 걸 의지했던 사람이 뒷통수를 쳤을 때 느끼는 배신감과 분노가 훨씬 더 큰 것처럼 

막연한 희망이 크면 클수록 그 희망만을 믿고 의지하며 견뎌오다

결국에 그 희망이 나를 배신했을 때 느끼는 절망감도 더 크게 되돌아와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버리는 것이다.   

 

‘프랭클’이 ‘아우슈비츠 수용소’ 에 대해 말하길 그 곳은 너무나

쉽게'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그 곳에서는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지

이것을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도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환경에서 끊임없이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연구해 나가면서 자신의 삶의 목적과 가치를 스스로 찾아낸 것이다. 

참 대단한것 같다.

그리고 이런 프랭클을 알아가다 보면 지금 헬조선이라는 우리의 현실속에서

필요한 답과 방향성을 제시해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살펴보자~

‘프랭클’이 같은 어려운 환경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이겨낼 수 있었던 비결! 
 

첫 번째, 
그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억지로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근거 없는 희망에 목을 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것을 선택했다.

두 번째,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 것에 초점을 맞추고 끊임없이 자신의 미래를 고민했다.

‘프랭클’은 ‘인간이 왜 사는지’ 알지 못하고 ‘인간으로서 존재자체’를 잃어버리면 
환경에 지배당하며 수동적으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쩌면 그 곳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육체적으로 힘이 센 사람이 아니라

내면이 강한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내적으로 자기의 가치 알고 그 끔찍한 경험을 자기의 성장에 역이용할 수 있는 사람 즉,

자기이해지능이 높은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자기이해 지능은 이처럼 우리 인생전반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프랭클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다. 


무작정의 긍정의 힘은 오히려 독이 되었지만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속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자기의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약이 된다. 

어려운 내용이 있었다면
‘희망에 속지 말고 절망에는 지지말길’ 
이 한 문장이라도 꼭 마음에 기억하길 바란다.

 

이제는 다시 우리들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은 아무리 힘들어도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의 생활만큼은 아니라고 본다.

그 곳에 있던 그들도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이었고 존중될만한 한 생명이었지만

시대를 잘못 만나서 그 시대에 그 곳에서 태어났다는 이유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으며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생각을 전환하여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자유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조금이라도 더가치있고, 의미있게 살기 위해 첫발을 내딛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러기위한 작은 몸부림이라 쳐보면 어떨까?


그럴 마음이 있다면 우선 나의 삶의 의미를 먼저 생각해보자. 

참고로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1. 무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서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서
3.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서 


이 3가지로 정의를 내렸다.

삶의 의미가 너무 거창하게 배부른 소리로 느껴진다면 
우리가 살아갈 이유가 무엇일까? 라는 질문으로 바꿔봐도 괜찮다.
나는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가? 라는 것이다.


살아갈 이유를 통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려보는 시도를 해보자. 
'원하는 일을 모른다면 절대 그 일을 찾을 수 없지 않는가?'

 

막연하게 미래엔 뭔가 되겠지~ 달라지겠지~누군가 해주겠지 라는 것은

오히려 나를 조금씩 조금씩 갉아먹다가 결국엔 내 삶자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미 위에서 
충분히 얘기했다고 본다.

즉, 내가 찾지 않으면 아무도 대신 찾아 줄 수는 없다
그래서 보통의 사람들은 그냥 눈을 감고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안주해 버리는 것 같다. 


그리고 나에 대한 고민을 제대로 하지 않다보니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가치를 따라가기 바쁘다.

결국에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을 살아가다 결국 또다시 절망하며 하루하루를 억지로 견디며 살아간다.

 

하지만 지금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은 
'결심’을 통해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르게 말하면 내가 직접 결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성공한 일도

'누군가가 이루기 전까지 모든 것은 불가능하다고 외쳤던 일'이 라는 말이 있듯이

'불가능이란 팩트가 아닌 의견'이라는 말이 있듯 시작은 너무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절대 아니다.

 

지금 펜과 종이를 준비해서 단 몇 자라도 써보길 바란다.

-나는 왜 사는가? 나의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 글을 읽으며 마음이 조금이라도 움찔거렸다면

당신은 이미 잠자고 있던 자기이해지능을 깨운 것이다.

 

그럼 이제는 이렇게 중요한 자기이해지능을 높힐 수 있는가? 라는 이야기를 해보겠다.


그리고 자기성찰지능=자기이해지능은 다른 지능들과 다르게

유일하게 나이가 들어서도 개발할 수 있는 지능이라고 앞에서 소개한 바 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자기이해지능을 높히면 다른 지능들도 향상된다는 점이다.

 

칼럼을 읽으면서 계속 본인의 자기이해지능이 높을까? 낮을까?

아님 나는 얼마나 그 부분을 발휘하며 살고 있을까 하는 고민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 그 지능이 높아지길 바라는 마음을 읽었기에 어떻게 하면

이 중요한 지능을 잘 계발하고 활용할 수 있을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얘기해 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이 방법은 모든 sns에 떠돌아다니는 
메모하기, 독서하기, 긍정적 생활하기 등 틀에 박힌 뻔한 해결책은 아니라는 것을 먼저 얘기해 둔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하니

꼭 집중 또 집중해서 뭔가 얻어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방법을 말하자면 바로 ‘관점바꾸기’이다.


생소하게 들릴수 있겠지만 관점바꾸기로 자기이해지능은 향상될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인식과 행동의 차이를 불러올 것이다.

 

관점의 차이에 대해 이해하기 쉽도록 한 예시를 준비했다.

‘추운 겨울산의 양달토끼는 굶어 죽어도 응달토끼는 산다’는 말이 있다.

응달에 사는 토끼가 추워서 얼어 죽을 것 같은데, 왜 양달토끼는 굶어죽고 응달토끼는 산다는 것일까? 
정답은
 바로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다. 이유는 간단하고 분명하다. 

양달 토끼는 눈이 녹지 않은 건너편 응달만 보인다. 얼어붙은 땅만 보이니 먹이가 없다는 선입견에 다시 굴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아무리 바라봐도 건너편의 응달은 녹을 생각을 안하니이 토끼는 굴 밖으로 나오지 않아 굶어 죽는다. 반면에 응달쪽 토끼는 봄이 온것을 먼저 알아채고 새싹도 보이니 희망을 가지고 험난하더라도 나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결과 양달과 응달의 산의 기온은 같더라도 그 두 토끼의 생사는 갈린다. 무엇을 바라보냐에 어떻게 행동하느냐 따라서 각각의 삶의 위치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미로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출구를 찾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때로 발목을 접지를수도 있고 벽에 몸을 부딪힐 수도 있지만 출구를 찾기 위해 힘써야 한다. 왜냐면 그대로 앉아서 때만 기다리면서 죽을 수는 없으니깐 말이다.

 

겨울 산의 양달토끼와 응달토끼 이야기기는 내가 지금 무엇을 바라보는 있는 가에 따라

엄청한 결과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그래서 같은 조건이라도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

생각과 행동이 변하고 삶이 바뀌고 결국 내가 달라진다.

 

이제부터는 다시 조금 어려운 용어를 쓸테니 좀 천천히 한 문장을 정확히 이해하면서 읽어주길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살짝 따라오기 힘들 수 있다는 점을 미리 알려주고 시작하겠다. 

우리는 살면서 주의(主義·이즘·ism)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보수주의·진보주의·제국주의·민족주의·공산주의·자본주의·전체주의·이슬람주의·신자유주의

등등의 주의가 있고 이 러한 주의가 원인이 되어 여러 가지 사건 들이 일어나고 있다.

즉 우리가 어떤 생각을 어떤 주의를 선택하느냐하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세상이 변해 가는데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두자. 

 

이처럼 어떤 생각을 가진 것 어떤 관점을 가지냐에 따라 개인 사회 국가 전체가 달라진다.
우리는 어떠한 주의를 가지고 살아가는가?

우리는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고 그 관점으로 어떤 주의를 선택했는가?
내가 말하는 관점이라는 말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어떤 사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에 중요한 수단이다.

 

그리고 관점의 기본엔 역사가 존재한다.

쉽게 말해 지금 우리나라에도 여전히 보수와 진보가 있다.

고려시대 조선시대에도 그리고 21세기에도 보수와 진보가 있고

그들의 보는 관점에 따라 한쪽은 철저히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지금 우리사회는 푯대가 없이 각자의 단순한 욕망대로 움직이는 물질주의 사회가 되었다.

잘 사는 것, 돈을 많이 버는 것, 나만 잘 되는 것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우리도 사실 거기에 물들어 성공이라는 가치에 각자의 행복을 중시하지만

다른 사람은 보이지않는 이기주의에도 물들고 있다.

절대적인 기준도 없고 누구도 가르쳐 준사람도 없기 때문에

결국 그런 각자는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자기 행복의 수단으로  

여기고 이용하는 것이 마치 당연한듯 여겨지고 있다.

 

잠시만 , 이번 칼럼은 다른 칼럼과 달리 어려운 용어도 나오고

철학적인 부분이 거론이 되어 어렵다 느낄수 있겠지만

자기이해지능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부분이라 넣을수 밖에 없는

내마음을 조금만 이해해 주기 바란다.

그래서 예시도 최대한 쉽고 우리가 알수 있는 부분으로

선별하도록 노력하고 있으니 끝까지 정주행 하길 바라며

칼럼을 4편을 마무리 해보겠다.

 

이번 예시는 우리가 모두 아는 소크라테스이다.

 

이렇듯 우리가 어떤 주의 어떤 이념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삶은 바뀐다.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시대는 상대주의가 주류를 이루었고 그에 따라

소피스트들을 중심으로 ‘진리는 변할 수 있다’ 생각이 팽배한 시대 였다.

간단히 말해 행복을 추구하는데 각각의 행복의 기준이 다르니

각자의 마음에 원하는대로 하겠다는 것을 존중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결과적으로 사회가 흘러가면 혼란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한 소크라테스는 그 시대 절대주의를 주장한다.

절대주의라 함은 무언가 절대적인 기준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즉 ,우리에게 기준이 없다면 개인의 혼란는 물론 개인의 집합체인

사회의 혼란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시대의 중심주의는 아까도 이야기 한것 처럼 상대주의이므로

이념이 다른 소크라테스는 사형악법도 법이다 라는 명언을 남긴 체 사형을 당한다.

심지어 자기에게 내려진 사형도

‘한나라의 법이일단 판결이 내려진 후에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 나라가 존속될 수 있을까?’

판결 준수 당위성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삶을 마감한다.

그가 절대적인 가치를 중시하지 않았다면

그는 친구와 제자들의 강력한 권유로 탈옥을 하며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떤 관점으로 어떤 가치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삶은 달라지게 된다.

우리의 관점은 ? 우리의 가치는?

때문에 우리가 어떤 관점으로 사는지에 대한 정확한 인지가 필요하다. 

가끔 어린친구들에게  좌우명이 무엇인지 물어볼 때

반 이상은 없다고 말하는것을 들을때 마음이 참 아프다.

그래서 질문을 다시 바꾸어 그들에게 소원을 물어본다.

그러면 거의 대부분 행복이라고 말을 한다.

그리고 다시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말을 한다.

다시 얼마나 벌어야 하고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해 물어보면

최대한 많이 벌고 싶고 여행도 다니면서 놀고 싶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관점이 없이 돈을 번다? 성공한다? 행복해진다?

이런 삶은 그저 껍데기 일 수 밖에 없다.

사실 어떤 중심이 없이 그렇게 '돈만 벌고 맛있는거 먹고 친구들이랑 놀러다니고 하는 삶'을

동물과 다름이 없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관점이 우리의 삶을 충분히 바꿀 수 있다.  

모든 개혁 자기발전 모든 변화는 이러한 관점이 변화로 이루어졌다. 

 

예전에 한 고등학교 2학년 친구와 상담을 마치면서

난감한 질문을 받는적이 있다. 

“ 원장님 말씀대로 하면 이런 사회에서도 그저 열심히만 하면 저에게도 희망이 있을까요?”

이건 또 무슨소리인가?!!!

이 이야기의 마무리는 자기이해 마지막 칼럼에서 풀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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